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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 중북부 미술과 사회
    카테고리 없음 2023. 7. 20. 12:38

     프랑스에서 파리와 근교를 중심으로 고딕 미술이 발달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중북부 지방이 새로운 미술의 근원지가 되었다. 현대의 이탈리아는 반도 전체가 하나의 국가이지만 당시엔 우리나라의 시나 도 크기 정도의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특히 중북부 지역은 남쪽의 교황국가와 북쪽의 신성로마 제국(현재의 독일지역)의 다툼 속에서 자치권을 키워나갔으며, 상공업 중심의 도시국가로 발달하면서 도시엔 시청과 광장이 형성되었다. 시청과 광장이 생긴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이 지어졌다는 사실을 넘어 다수에 의한 정치와 시민의 모임이 활발해졌음을 의미한다. "도시는 공기마저도 자유롭다"는 기록은 당시의 활발한 도시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종교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에 가장 큰 중심이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교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보다는 성경 말씀의 실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예수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신성보다는 이 땅에서 고통을 겪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하면서 고통에 동참하고자 한 것이다. 천여년 동안 지속되어온 교회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사람은 바로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였다. 이탈리아 역사에서는 르네상스를 태동시킨 이 시대의 인물로 세 사람을 꼽는데, [신곡]을 저술한 단테와 성 프란체스코, 그리고 화가 지오토(1267-1337)이다. 세 사람은 각각 문학, 종교, 미술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로 우리는 이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즉 현실을 그렸다는 점이다. 단테는 '신곡'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소설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 들은 당시 사회의 실제 인물들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산 예수를 되찾아주었다. 그리고 화가 지오토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상징적인 비잔틴 방식의 그림을 현실의 모습으로 바꾸어놓았다. 이탈리아의 14세기 미술을 흔히 프로토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즉 원시적인 르네상스라는 뜻인데, 이는 역사에서 중세 말이라고 부르는 이 시대가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상의 변천

     

     이제 미술로 들어가보자. 13-14세기의 그림은 어떻게, 그리고 왜 변화였을까? 여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린 넉 점의 패널화를 비교하면서 생각해 보겠다. 이것들은 십자가 모양의 마누패널에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교회에 걸려 있던 것이다. 13세기 초에 베를링기에리가 그린 첫 번째 그림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이지만 마치 팔을 벌린 듯 서 있으며 눈도 뜨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부활하여 영원하게 된 승리의 예수인 것이다. 이보다 10년쯤 뒤에 준타 피사노가 그린 예수님은 이와는 달리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성 프란체스코는 자신도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종교운동은 그들의 기도 대상이었던 예수님의 모습까지 바꾸었다. 그리고 이보다 40-50년 후에 치마부에가 그린 예수는 고통스런 표정과 함께 인체의 볼륨감까지 살린 인간의 형상이다. 우리가 비잔틴 회화에서 본 영원하고 신성한 느낌을 주는 금색도 사라졌으며 예수의 몸도 십자가에 매달려 휘어진 모습이다. 1290년대에 지오토가 그린 예수 상의 치마부에가 그린 것보다 더욱 사실적이다.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이렇게 고개는 앞으로 숙여지고, 어깨는 아래로 쳐지고, 엉덩이는 뒤로, 그리고 무릎은 앞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13세기의 백여 년 사이에 기독교의 예수는 영원한 절대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회화는 상징에서 사실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종교의 변화, 미술의 변화가 아니고 더 크게 보아서는 사회의 요구라 할 수 있다. 

     

    마리아 신앙과 제단화

     

     마리아의 모습도 많이 변하였다. 13세기 초에 제작된 일명 <눈이 큰 성모>에서 마리아는 정면으로 앉아 아기를 안고 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크기만 작을 뿐 어른 형상이다. 다름 아닌 심판하러 오실 예수이기 때문이다. 테오토쿠스라는 이 유형은 어머니로서의 마리아가 아니고 예수의 육화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마리아였다.

     

     그러나 14세기 초에 제단화로 제작된 지오토의 <옥좌의 성모자>는 엄마와 아기의 관계이며, 예수의 비례도 이전의 어른 비례에서 벗어나 4등신에 가까운 아기의 비례로 그려졌다. 13-14세기 동안 확산된 마리아 숭배 신앙은 어머니의 미덕을 주요시하여 바닥에 앉아 젖을 먹이는 <겸손한 마리아>로, 또는 최후의 심판에서 마리아의 망토로 우리를 보호해주는 <자비로운 마리아>로 나타난다.  

     

    르네상스 미술을 연 지오토의 회화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중세의 종교개혁자라 일컫는 프란체스코로부터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아시시는 그의 무덤 위에 교회를 크게 짓고 지오토에게 프란체스코의 일생에 관한 벽화를 주문하였다. 교회는 밀려드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내부의 기둥 없이 단일한 공간으로 지어졌고, 양쪽 벽 창문 아래엔 프란체스코의 일생이 그려졌다. 교회에 들어사자마자 양쪽 벽면에 커다란 규모로 펼쳐진 벽화를 상상해보라. 아마도 당시 이 새로운 시도를 보던 사람들은, 현대의 우리가 대형화면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느꼈을 것이다. 

     

     25장면의 일화 중 하나인 <세상의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프란체스코>의 그림은 프란체스코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받기 위해, 현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장면이다. 그림의 상하좌우를 보면 위엔 석가래 모양이, 아래엔 커튼이, 그리고 좌우엔 기둥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장면은 건물의 창밖 풍경처럼 그려진 것이다. 베경의 건물 또한 원근법을 적용시킨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로마 회화에서 본 창으로서의 회화 개념이 다시 재현되는 것이니 고대 이후 천여 년 만의 부흥이다. 

     

     치오토는 또한 성경의 주제를 매우 인간적인 감정으로 해석하였다.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그려진 예수의 일생 중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을 보자. 예수의 시신을 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 마리아, 양팔을 벌린 채 놀라워하는 여인과 두 손을 뺨에 대고 슬퍼하는 여인, 예수의 발을 만지면서 못 박힌 자국을 보며 애통해하는 여인, 그리고 두 팔을 뒤로 젖힌 채 탄식하는 제자 등에서 우리는 인간의 감정을 풍부히 느낄 수 있다. 

     

     14세기 새로운 미술을 연 지오토의 혁신은 13세기 다른 작가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의 장면은 새들마저도 프란체스코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같은 주제를 그린 1235년경의 베를링기에리의 그림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와 비교해보면 지오토는 나무와 사람, 그리고 새의 비례를 사물의 크기대로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중요한 것을 크게 그리던 중세의 방법에서 사물 외관의 비례를 중요시하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프란체스코의 옷을 처리한 방법도 눈여겨보자. 몸통과 소매의 주름살을 많은 부분 생략함으로써 마치 원기둥같이 단순하면서 양감이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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