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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렌체 미술의 후원자와 미술의 사회적 역할
    카테고리 없음 2023. 7. 20. 13:20

    르네상스

     

     우리는 문화가 발달한 시대를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발달한 예술을 높이 평가하면서 비롯되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다시' '태어나다'라는 뜻으로 중세에 죽었던 고대문화가 15세기에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그들이 모델로 삼는 원형은 그리스 로마의 고대에 있었던 것이다. 고전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학문을 인문주의라 하였으니 고전을 통하여 신 중심의 중세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지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술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 아마도 미술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천재로 칭송되는 예술가들이 활동하여 인류 역사에 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우리가 인지 말아야 할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순수미술품이 아니라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며 사회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수도원 식당의 벽화였으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공화정 정부가 시청 앞에 놓았던 상이다. 그 시대에도 많은 돈을 들이는 사업에는 특정한 목적과 그만한 효과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의 이탈리아가 특별히 좋은 예술품들을 많이 낳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목적과 효과에 맞는 새로운 방식의 혁신적인 미술이 선택되고, 미술가는 서로 경쟁적으로 이에 부응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5세기 초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몇몇 작품들의 주문과 제작을 살펴보면 교회나 상공업자, 정부 등의 주문자와 미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부조 공모

     

     피렌체 대성당의 세례당엔 현재 3개의 청동문이 있는데, 1401년 교회에서는 그 중 한 문의 작가를 선정하기 위해 공모를 했다. 청동문의 부조는 성경의 여러 주제로 구성되어 있지만 공모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주제를 제작하여 내도록 하였다. 그 중 기베르티와 부로넬레스키가 낸 두 작품을 보자. 

     

     여러분은 어느 작품을 선장하겠는가? 안정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기베르티 것을, 현장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브루넬레스키 것을 선호할 것이다. 이 시대에는 기베르티 것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정의 기준엔 단순히 미감한 작용한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면도 작용하였다. 기베르티 것은 하나의 부조에 이삭 부분만 따로 붙인 것인 데 비해 브루넬레스키 것은 7개의 부분으로 주물하여 붙이게 되어 있다. 브루넬레스키 것은 한 부분이 잘못되면 그것만 주물을 따로 떠서 붙이면 되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만약 그의 것을 선정하였다면 주물갓이 더 들고 시간도 더 들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기베르티의 더 발달된 주물 기법을 높이 산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두 작가를 평가한다. 기베르티는 이삭의 묘사에 고전적인 방법을 구사하였지만, 이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긴박한 장면은 브루넬레스키의 표현이 더 현장감 있다고 말이다. 또한 공간 사용의 문제에서도 기베르티는 반원형과 사각의 모서리로 구성된 외곽의 틀에서 한가운데의 ㅁ녀적만 이용했지만, 브루넬레스키는 반원형이 이루는 공간을 모두 이용함으로써 확장된 공간을 마들어가고 있다. 실제로 두 작가의 이후 활동을 보면 근본적인 자향점이 매우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기베르티는 이 공모를 계기로 주문을 가장 많이 받는 조각가가 되었지만 조형상에서는 르네상스보다 후기 고딕의 장식성을 띠었다. 반면 브루넬레스키는 이 공모에서 탈락한 후 조각보다는 건축에 주력하면서 피렌체 대성당의 둥근 지붕을 비롯한 르네상스 건축의 새로운 공간 개념을 실현시켰다. 15세기 당시의 기준과 현대에 평가하는 르네상스는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예이다.

     

    길디의 수호성인상 주문

     

     피렌체의 대성당과 시청을 잇는 시내 한가운데엔 오르산미켈레라는 성당이 있다. 건물 외벽에 있는 14개의 감실에는 기베르티의 <세례 요한>, 도나델로의 <성 지오르지오>, 베로키오의 <도마의 의심> 등 당대의 가장 뛰어난 조각가들이 제작한 성인상들이 있다. 그러면 이 성인들은 어떻게 선택되고 제작에 필요한 비용은 누가 냈을까? 이 성인들은 모두 가톨릭의 성인들이지만 복음사기라든지 순교자라든지 하는 신앙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당시 피렌체의 공식적인 정치와 경제는 일종의 동업자 조합인 모직상 길드, 면직 공업자 길드, 갑옷 제조업자 길드, 건축가와 조각가 길드 등 길드의 대표자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성인들은 바로 길드의 수호성인으로, 예를 들면 원래 세리였던 마테는 은행가 길드의 수호성인, 낙타털을 입고 다녔던 세계 요한은 모직상 길드의 수호성인, 용을 창으로 찔러 공주를 구한 지오르지오는 갑옷 제조업자의 수호성인, 이교의 상 제작을 거부하였던 기독교 초기의 순교자 네 명은 건축가와 조각가의 수호성인이었다. 이들 성인은 종교적인 기능보다 피렌체 사회의 정치 경제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길드들은 거의 공공장소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에 자신들의 수호성인을 배치하고자 제작비를 부담함으로써 자신들의 조합의 위치를 확고히 한 것이다. 

     

     길드에서는 조각상에 조합의 특성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면직 공업자들은 그들의 수호성인 마르코에게 면 쿠션을 밟고 있게 하였으며, 건축가와 조각가 길드는 수호성인 하단에 그들의 작업 광경을 새겨넣었다. 각 길드에서는 당연히 다른 길드의 상보다 돋보이는 작품을 놓으려 하였고, 조각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새로운 방법의 조각을 제작하였다. 은행가 길드는 기베르티에게 <성 마태>를 주문하면서 이 작품은 모직상 길드가 주문한 <세례 요한>과 크기가 같거나 더 카야 하며, 청동주물은 몸과 머리 두 부분으로 주조해야 한다고 계약서에 명시하였다. 기베르티는 물론 계약사항을 이행하였고 또한 이 상보다 4-5년 전에 설치된 도나텔로의 <성 지오르지오> 상이 지닌 양감과 고전적인 구조를 참고하여 그가 전에 만든 <세례 요한>의 약점이었던 장식성을 극복하였다. 기베르티가 참고한 도나텔로의 <성 지오르지오>는 제작 당시부터 당대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받았다. 약간의 콘트라포스토 포즈를 구사한 당당한 자세와 늠름한 양감 등이, 르네상스인들이 추구하였던 고대조각의 이상을 충분히 되살려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각상 밑의 부조에는 원근법을 적용함으로써 매우 낮은 부조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공간감을 주는 스키아치아토식 부조 기법을 창안하였다. 이는 당시의 화가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하던 회화의 원근법을 부조에 적용시킨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난니 디 방코의 <네 성인>의 얼굴 부분을 보면 여러분들도 금방 로마의 초상이 떠오를 것이다. 르네상스의 소설가와 철학자들이 고대의 문헌을 참고함으로써 현실을 묘사하였듯이 조각가들 또한 고대조각을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15세기에 요구되던 사실적 묘사의 방법을 키워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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