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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을 위한 미술 : 미켈란젤로_1
    카테고리 없음 2023. 7. 26. 17:05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피렌체의 근처 카프레제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기부터 1564년 사망까지, 즉 15세기말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 역사는 격변기였다. 평온을 유지하던 피렌체는 1492년 로렌초 디 메디치가 죽자 1494년에 프랑스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1495년엔 메디치 가가 피렌체로부터 추방되었다. 그 후 공화정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힘은 약하였고, 1512년엔 메디치 가의 코지모가 장악하면서 피렌체는 거의 군주국가가 되었다. 한편 로마의 교황청 국가는 1527년 신성로마 제국(현재의 독일)의 침략과 약탈에 위기를 겪는 한편 1517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의 권위마저 흔들렸다. 메디치와 공화정의 집권이 반복되던 피렌체와 로마의 교황청은 위기감을 느낄수록 위안과 과시의 정치를 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술 주문으로 이어졌다. 미켈란젤로는 이 시대에 공화정과 메디치, 그리고 교황의 가장 큰 주문들을 받으면서 그의 작품들은 정치 속에서 예술가가 겪는 보호와 갈등, 그리고 개인의 종교적 구원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열세 살에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이듬해 로렌초 디 메디치의 주목을 받으면서 메디치 가가 수집한 고대 조각들을 자유로이 접하고 이를 통해 조각의 기술을 익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시기에 제작한 <센토들의 싸움>과 로마 체류 중 제작한 <바커스>는 그의 초기 학습과정을 잘 보여준다. <바커스>는 로마의 조각을 그대로 모사한 듯하며 그리스 신화를 부조로 새긴 <센토들의 싸움> 또한 주제와 기법 면에서 고대조각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20세를 전후하여 제작한 이 두 조각에서 우리는 벌써 미켈란젤로의 특징을 느낄 수 있다. <센토들의 싸움>의 수많은 군상들이 서로 부딪치고 밀고 당기는 투쟁과 갈등, 그리고 술에 취한 듯 넘어질 것 같은 <바커스>의 불균형은 그의 긴 생애 동안 남긴 작품들 속에 언제나 배어 있는 요소이다. 

     

     1494년 그는 피렌체를 떠나 볼로냐에 잠시 머문 후 로마에 체류한다. 이 기간 중 제작한 <피에타>와 피렌체로 되돌아가 제작한 <다비드>는 그가 이전 시기에 습득한 고전적인 조각 기법의 완성을 보여준다. 마리아의 섬세한 옷주름과 죽은 예수의 시신이 축 늘어진 근육묘사는 대리석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사실적은 묘사의 단계로 이끌었다. 피에타는 피라미드형의 안정된 구도를 지니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이 안정감을 만들기 위해 마리아의 어깨와 치마폭을 좀 더 넓게 잡고 있다. 스물네 살이었던 미켈란젤로도 자신이 이룬 기술의 완성에 만족한 듯하다. 수많은 그의 작품들이 미완성으로 끝나고, 모두 서명이 없는데 이 작품에만 사인을 남겼다. 미켈란젤로의 사인은 마리아의 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띠에 새겨져 있다. 이 작품의 세부묘사는 사실적이지만 구도나 도상은 임의로 설정되었다. 이 작품처럼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앉혀놓는 자세는 중세부터 내려오던 도상이다. 또한 마리아는 서른세 살의 아들이 있는 어머니이기보다 수태고지를 받던 10대의 소녀 같다. 순결한 성처녀 마리아를 강조한 것이다. 

     

     1500년경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공화정은 그에게 <다비드> 상을 주문한다. 그리고 조각상의 공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던 피렌체 공화정은 이를 시청 앞에 높음으로써 <다비드>로 하여금 나라를 구한 소년 영웅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미켈란젤로가 구현한 고대 남성 조각의 조형미, 사실과 이상의 조화는 조각으로서 완전할 뿐만 아니라, 새로워진 공화정의 이념으로서도 더없이 적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돌팔매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죽인 다비드 이야기를 상기한다면 콘트라포스토의 자세로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적을 향해 행동하는 영웅이기보다 조화와 균형을 숭상하는 도덕적인 이상의 영웅인 듯하다. 

     

     피렌치가 아직 공화정으로 있을 때 시장은 곤팔로니에레(군대 최고 지휘자)의 커다란 방 양쪽 벽을 장식할, 피렌체가 치른  전쟁의 그림을 주문하였다. 하나는 1440년 밀라노 군을 퇴각시킨 <앙기에리 전투>이며, 다른 하나는 피사 근처에서 치른 <카시나 전투>이다. 전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1503), 후자는 미켈란젤로에게(1504) 주어졌다. 두 대가의 그림이 한 방에서 한 시기에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사회의 커다란 관심거리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 그림은 완성되지 못하였고, 피렌체는 공작정치로 변하였다. 그리고 1563년 공작은 이 자리를 지오르지오 바사리의 그림으로 대치시켰다. 원작은 남아 있지 않으나,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이 그림은 루벤스와 상갈로의 드로잉으로 그 모습을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기마병들이 서로 엉켜 싸우는 격동적인 순간을 택하였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군인들이 강에서 목욕을 한 후 대장의 부름에 다시 준비하는 순간을 택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설정으로 많은 누드의 다양한 포즈를 그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든 듯하다. 그가 열일곱 살에 제작한 <센토들의 싸움>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그는 누드의 군상이 주는 에너지를 매우 선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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