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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황청의 고전주의와 라파엘로카테고리 없음 2023. 7. 13. 17:49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 교황청은 종교만을 주관하는 기관이 아니라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중부와 북동부에 이르는 큰 영토를 지닌 교황청 국가였다. 또한 로마는 가톨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고대로마 제국의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이었으니 가톨릭과 고대문화 가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곳이었다. 야심이 큰 교황들은 언제나 '세계의 머리'로서의 로마를 재건하려 하였고 그때마다 고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 경향의 미술이 적용 또는 이용되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재위 1471~1484)는 로마의 도시계획을 정비하고, 옛 문서를 모아 도서관을 설립하였으며, 고대조각들을 모아 박물관을 지었다. 바티칸 도서관의 벽면에 그려졌던 <플라티나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식스투스 4세>는 도서관과 고대가 교황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말해준다.
교황은 로마의 황제같이 옥좌에 앉아 있고 관장은 무릎을 꿇고 임명을 받는다. 그러나 화면 가운데에는 관장보다 더 중요하게 차지한 인물이 있다. 교황의 조카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으로 훗날 교황 줄리오 2세가 될 인물이다. 줄리오 2세가 이 도서관을 증축하였을 때 한 설교자는 "(당신의 삼촌 식스투스 4세가) 배움의 전당을 세우고, 당신은 이에 액자를 끼웠다. 그가 교황청 도서관을 세웠으니 여기에 아테네를 가져온 것이다"라고 칭송하였다. 교황이 고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고대의 영광을 현재에 가져오는 것이었다.
줄리오 2세는 교황이 되자 로마가 고대의 위용을 다시 갖추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을 계획하고, 고대조각들을 열성적으로 모아 바티칸박물관을 만들었으며, 조각전시를 위한 정원도 조성했다. 또한 궁 안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의뢰하고, 라페엘로에게는 <서명실>의 벽화를 주문했다. 교황의 이 왕성한 미술사업은 로마 제국을 되살리고, 자신이 줄리우스 시저의 이미지를 갖추는 것이었다. 줄리오 2세가 브라만테에게 설계를 의뢰한 <벨베데레 정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다. 팔각형의 정원에 고전적인 건축방식의 감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배치된 조각전시 방법은 실로 쾌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어서 이후 조각 전시방법의 모델이 되었다.
고대 조각을 공부할 때 언제나 언급되는 <라오콘>과 <벨베데레의 아폴론>도 이때 수집, 전시된 것이었다. 당시 고대조각의 수집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발굴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지닌 로마는 이러한 유행을 주도하였다. 부와 종교권력을 지닌 교황청은 도서관과 박물관을 조성함으로써 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매우 정치적이었던 교황 줄리오 2세는 이미지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506년엔 4세기에 세워진 바실리카 형태의 <베드로 성당>을 완전히 다시 지을 계획에 착수하고, 1508년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주문하여 그의 삼촌인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시작한 시스티나 예배실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듬해엔 라파엘로에게 현재의 <서명실> 벽화를 주문하였다. <아테네학당>과 <성체에 대한 논쟁>등의 주제로 그려진 소위 <서명실> 벽화는 라파엘로 회화의 가장 완숙한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줄리오 2세의 고전주의 정책을 잘 반영하고 있다. 주문자의 정책과 화가의 스타일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서명실>이라 부르는 바티칸의 이 방은 줄리오 2시 당시 교황의 개인 서재였다. 당시의 서재는 외교적인 광간이었고, 이 그림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물이었다. 그러면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어떻게 이교의 학문인 <아테네 학당>을 이러한 공간에 그리게 하였을까? 교황 줄리오 2세는 군사원정도 마다하지 않던 정치적인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가 단순히 그리스 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이 그림을 주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네 벽면에 그려진 이 방의 회화는 각기 신학을 나타내는 <성체에 대한 논쟁>, 시를 나타내는 <파르나소스>, 법학을 나타내는 <세 덕성>, 그리고 철학을 나타내는 <아테네 학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 문학, 법학, 철학 이 네 주제는 당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분류이기도 하며 대학의 전공분류이기도 하였으니 학문의 네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브라만테가 설계한 베드로 대성당의 르네상스식 건축물 아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서로 토론하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제자가 받쳐주고 있는 작은 판에 그려진 도형을 보며 음악의 조화에 대하여 쓰고 있으며 유클리드는 컴퍼스로 두 개의 삼각형을 그려 보이며 그의 기하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법칙에 몰두한 어린 학생들의 놀라워하는 표정은 진지한 배움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그 오른쪽에서 지구를 들고 있는 톨로메오, 천계를 들고 있는 조로아스터 등 서로 다른 시대의 철학자, 수학자와 천문학자들이 모두 모여 <아테네 학당>을 이루고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라파엘로는 이 두 철학자를 원근법의 소실점에 배치함으로써 시선의 중심에 놓이게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로 그려진 플라톤은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에는 자연에 대한 그의 저서 [티마이오스]를 들고 있음으로써 자연의 근원은 하늘에 있음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왼손에 그의 저서 [윤리학]을 들고 오른손 바닥을 펴 땅을 가리킴으로써 인간행동에 대한 도덕적 철학자임을 나타낸다. 이렇게 라파엘로는 각각의 철학자를 나타내는 도상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지식'인 철학은 맞은편에 그려진 '신성한 것에 대한 지식'인 신학과 함께 인간의 지식은 모두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라파엘로의 조화로운 화풍은 이들이 이룬 질서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제같이 느끼게 하는 사실적인 기법과 관객을 끌어들이는 연극적인 제스처들은 보는 이를 그림에 참여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림에 있는 고대의 인물과 이를 보고 있는 현대의 인물이 함께 있는 고대와 현대의 공존은 '다시 태어난 로마'를 이루고자 했던 교황 줄리오 2세의 정책에 부합하는 이미지였던 것이다.
'다시 태어난 로마'라는 이미지는 로마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교황의 정책이었다. 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 신성로마 제국, 스페인 왕정의 시력 확정 속에 힘이 약화되었으며 교황청은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해야 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교황 줄리오 2세는 비록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나 군사원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교황은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볼로냐에서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며 "프랑스 왕 루이를 이탈리아에서 모라낼 때까지는 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1512년 4월 라벤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로마를 지키고자 했던 교황의 의지는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의 초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1512년에 제작된 교황의 초상은 아직 흰 수염이 그득하며 고심에 찬 표정이다. 교황의 정치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였으며, '군인왕' '새로운 시저'라고 풍자하였다. 실제로 교황 줄리오 2세는 기독교의 수장이었으나 정치가 시저의 야망을 지녔으며, 위기의 로마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로마 시대 이후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미술을 동원한 이러한 이미지 만들기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로마를 예술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정치적인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못하였다.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가톨릭 역사상 최악의 상황에 부딪힌 것이다.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고전적인 이미지로 미화시킨 정책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양식도 곧 매너리즘을 맞아 붕괴되었으니 이 시대 고전주의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의 추구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