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Today
Yesterday
Total
  • 그리스 회화와 헬레니즘 미술
    카테고리 없음 2023. 7. 14. 22:24

     그리스 도자기를 통하여 살펴본 아르카익 시대의 회화는 기원전 5세기의 고전기에 큰 규모의 벽화로 발전하였다. 원근법과 명암법, 다양한 색채가 구사된 사실적인 회화는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들은 2500여 년의 흐름과 함께 소멸되었으며 문헌의 기록을 통해서만 그리스 회화가 얼마나 사실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로마의 폴리니우스는 기원전 4세기 초에 활동한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경쟁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하루는 제욱시스가 포도송이를 그리니 새가 진짜인 주 ㄹ알고 그림에 날아 앉았다고 한다. 득의양양한 제욱시스는 파라시우스의 그림을 보자고 하면서 앞에 있는 커튼을 걷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커튼은 바로 피라시우스의 그림이었다. 제욱시스는 자기는 새를 속였지만, 파라시우스는 화가인 자기의 눈을 속였으니 파라시우스가 더 훌륭한 화가라고 인정하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그림은 진짜같이 보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크세노폰은 파라시우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의 대화를 전해준다.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피라시우스의 집에 와서 그에게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냐고 묻자 파라시우스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다시 인간의 마음, 즉 달콤함, 친절함, 사랑스러움 같은 것은 모방할 수 없느냐고 묻자 파라시우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그리겠느냐고 대답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다시 천함이나 부자유, 겸손함이나 사려 깊음뿐만 아니라 장엄함이나 자유로움 등도 얼굴의 표정이나 동작의 태도에 나타나는 것이니 모방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되묻자 파라시우스는 가능하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글들은 몇 세기를 거치는 동안 윤색되어온 내용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리스의 회화가 사실성과 함께 인간의 감성을 나타내려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스의 화가 중에서도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아펠레스는 그의 이전에도, 그의 이후에도 그를 능가하는 화가는 아무도 없었다고 칭송받았다. 알렉산더 대와의 초상화 가였던 그는 신화와 역사 이야기까지 광범위하게 그렸으나 전해지는 진품은 없다. 다만 로마시대의 모작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일명 <알렉한더 모자이크>는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에게 크게 이긴 <익수스 대전>을 그린 기원전 4세기 후반의 그림을 폼페이에서 모자이크로 모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의 알렉산더 대왕은 창을 들고 공격하고, 페르시아 왕은 황급히 마차를 돌려 뒤를 쳐다보며 후퇴하는 박진감 넘치는 구도이다. 대각선으로 배치된 페르시아 군대의 창들은 원근감을 느끼게 하고 인물엔 명암법을 구사하여 볼륨감을 느낄 수 있다. 우왕좌왕하는 퇴각의 혼란스러움과 다리우스의 겁먹은 표정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느낄 수 있다. 모자이크 모사가 이렇다면 그리스의 진작이 연출하였을 생동감 넘치는 효과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실제 장면이 아니고 특정효과를 내는 연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숨막히는 전쟁에서 왼편의 알렉산더는 투구도 쓰지 않았으니, 이는 알렉산더를 젊고 건장한 영웅의 이미지로 남기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미술을 자신의 영웅적 이미지 만들기에 적극 활용한 최초의 정치가였다. 그는 자신을 용맹스럽게 보이기 위해 헤라클레스의 사자탈을 쓴 모습으로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언제나 태양신 헬리오스를 연상시키는 사자갈기머리에 보는 이를 제압하는 깊은 눈의 강렬한 시선으로 묘사하게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 출신이었으나 범 그리스 정책을 써서 그가 정복한 지중해 중심의 전 영역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였다. 그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범 그리스 문화를 일컫는 헬레니즘은 그리스 미술이 각 지역에 이식된 복합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소아시아 반도에 위치한 도시 페르가모의 군상과 제단을 보자. <죽어가는 갈리아인>과 <아내를 죽이고 자결하는 갈리아인>은 로마 시대의 복제품이지만 원작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원래는 다섯 점이 모여 이루어진 군상으로 아탈로 1세가 갈리아에게 이긴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죽음을 앞둔 갈리아인과 적의 포로가 되기보다 죽음을 택하는 무사의 처참함에서 우리는 고전기가 지니고 있던 숭고함이나 영웅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연극적으로 세팅된 비극적인 참담함을 느낄 수 있다. 아탈로 1세는 자신의 승리를 직접적인 방법으로 나타내기보다 적의 비참한 최후 장면을 택함으로써 어렵게 얻은 자신의 승리를 간접적으로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다. 

     

     아탈로 1세의 아들 에우메네 2세는 아버지를 위해 제우스 제단을 건립하였다. 열주와 팀파눔 형식의 단일구조는 기원전 2세기에는 복합적인 모양의 구조로 변하였으며, 팀파눔이나 메토프에 새겨져서 멀리 올려다보아야 했던 부조는 계단 옆 아래에서 보는 이의 눈앞에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폭이 36.5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제단은 그리스 모델을 받아들여 파격적으로 변형시킨 헬레니즘의 양상을 잘 대변한다. 

     

     부조로 새겨진 다이내믹한 움직임과 격렬한 표정의 장면들은 신들과 거인족의 싸움이다. 신화의 싸움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균형과 절제를 지니고 있었던 고전기의 부조들과 달리 기원전 2세기 소아시아에 이식된 그리스 조각은 온통 격렬한 움직임뿐이다. 조각들은 깊게 파여 강한 표현력을 지니며 신들에게 패배한 거인들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신전의 구조와 조각수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주제에서 그리스인의 방식을 받아들여 변형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인들이 신이나 영웅을 한편에 두고, 이에 대항하는 반인반수의 괴물이나 거인족을 적으로 대치함으로써,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의 싸움을 선과 악의 대결로 삼았듯이, 페르가모인은 자신들과 갈리아인의 싸움을 신과 거인족의 전투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인에겐 페르가모인도 야만인이었으니 그들 또한 식민종주국의 문화적인 지배 방법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