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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 미술의 특징_2
    카테고리 없음 2023. 7. 16. 13:25

     '로마'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가? 개선문, 콜로세움, 로마 황제...., 그렇다 바로 그런 것이 로마의 유산이다.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영토확장과 그것의 유지였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를 하면 개선문과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스인들은 전쟁에 승리한 후 신전을 지어 신에게 감사드렸다면 로마인은 이를 황제의 업적으로 기린 것이다.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엔 그들이 예루살렘 점령 후 전리품을 들고 성 안으로 들어오는 부조를 새기고, 아치 안에는 독수리로 로마 황제를 상징하였다. 로마인에게는 승리와 개선이 최고의 명예였으며 개선문을 세워 이를 기념하였다. 

     

     로마인은 또한 기념주를 만들어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부조로 새겼다. <트라이아누스 기념주>는 높이가 4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기둥이다. 기둥 표면을 나사 모양으로 둘러가며 띠를 형성하였는데, 200미터에 달하는 이 띠엔 트라이아누스가 수행한 다치아(현재의 루마니아)와의 전쟁, 즉 101-102년과  105-107년 두번에 걸친 전쟁의 기록을 부조로 묘사하였다. 그리스의 페리클레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파르테논 신전을 건립하면서 반인반수나 거인족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적을 암시한 것과는 달리 로마인은 황제가 다치아와 직접 싸우는 장면을 묘사하였으니, 이는 신화보다 인간의 역사를 중요시 여기는 사고의 결과일 것이다. 

     

     콜로세움은 현대의 많은 영화장면들 덕분에 검투사들의 싸움터로, 기독교인의 박해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주로 공공의 행사를 거행사던 장소였다. 우선 외부부터 보면 콜로세움은 거대한 원형의 단일 건물이다. 그리스인은 주로 열주 형태를 사용한 데 반해 로마인은 아치를 주요 건축 요소로 적용하였다. 아치 사이에 그리스식의 기둥이 있지만 건축적인 기능을 하기보다 장식적인 역할만을 할 뿐이다. 내부는 현대의 운동경기장 같이 스타디움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관람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으며 한 번에 5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건축물이다. 

     

      로마 미술의 또 다른 업적 중 하나는 초상조각이다. <로마 귀족의 초상>의 초상을 보자. 귀족의 초상이라고 여겨지는가? 아니면 왜 아닐까? 미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같은 서민도 사진을 찍을 때면 되도록 잘 나오도록 인상관리를 하는데 로마인은 귀족도 미화시키지 않았다니 매우 특별한, 현실적인 사회라고 생각된다. 로마의 귀족들은 집에 조상들의 초상조각을 진열해놓았다가 집안 식구의 장례 때 이 상들을 들고나갔다고 한다. 조상이 후손의 장례에 참석한다는 의미일 테니 가문의 중요성이 컸던 사회에서 생겨난 관습이라 할 수 있다.

     

      초상의 대상은 남녀노소가 다 포함되지만 여기에서는 로마 초기부터 4세기경까지의 황제 초상을 살펴봄으로써 각 시대가 어떠한 지도자를 원하였는지, 사회의 변천을 알아보자.

     

      <실라 초상>의 초상은 기원전 82년부터 4년간 로마를 통치하였던 참주 실라(기원전 138-78)의 초상이다. 참주로서의 권위보다 마른 얼굴에 집요한 성격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어서, 이상화시킨 그리스의 인물상과는 매우 다른 로마의 초상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로마가 삼두정치 시대를 마감하고 황제 시대로 접어들면서 실제를 직설적으로 나타내던 로마의 초상 방식은 점차 그리스 헬레니즘 양식을 가미하게 된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섬세한 얼굴에 예민산 성격의 개인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지만 주름까지 나타내던 이전의 로마 초상과 달리 얼굴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어 미화시키고 있다. 국가를 황제 체제의 로마 평화시기로 정립시키는 시기에 그리스 방식을 적용시킴으로써 황제를 정통화하는 것이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옥>은 이 시대 헬리니즘적 성격의 기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의인화한 투구를 쓴 상 옆에서 그리스 영웅같이 반 누드로 있고, 우주의 상징인 오이코우메네가 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다. 방패를 딛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옥좌 아래엔 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있으며, 아랫단엔 로마군들이 적을 포로로 삼는, 즉 승리의 순간을 새겨놓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이상화시키는 이 모든 내용들은 우아하고 세련된 헬레니즘 양식으로 잘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로마가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고, 또한 내부적으로도 가장 안정된 로마 전성기의 황제는 늠름한 젊은이로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앞서 살핀 <트라이아누스 기념주>의 주인공인 트라이아누스 황제는 98년에서 117년까지 19년간을 통치한 소위 5현제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기념주에서도 부관과 의논하고 있는 인간적이고 현명한 황제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2세기 후반부터 로마는 그들이 정복한 변방의민족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재위 161-180)는 그의 [명상록]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의무였음을 토로하며, 전쟁의 광경을 "뼈다귀를 위해 싸우는 인형들"이라고 적고 있다. 이 시대의 미술엔 특히 이러한 비참함이 강하게 배어있다. 그의 기념주엔 포로를 참수하는 끔찍한 광경이 묘사되고, 그의 시대에 제작된 또 다른 부조의 장면은 적장이 아들과 함께 항복하는 장면을 처참하게 묘사하고 있다. 눈동자와 머리칼, 그리고 옷자락을 깊게 파는 표현주의적인 조각기법은 참담함을 나타내는데 적절한 새로운 양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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