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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 미술의 특징_3
    카테고리 없음 2023. 7. 17. 15:01

     시대의 아픔을 철학자적인 자세로 감수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는 달리 그의 계승자 콤모두스 황제(재위 180-192)는 변경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원로원이 아닌 경기장에서 세월을 보내어 국가를 더욱 위기에 빠뜨렸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강한 황제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헤라클레스에 비유하였다. 안팎으로 흔들리던 로마는 더 이상 훌륭한 한 인간인 황제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점차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황제를 요구하는 사회심리를 보이게 된다. 

     

     이후 150여 년이 지난 4세기 전반, 황제는 초월적인 존재가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초상>의 초상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5-337)이다. 황제 상은 더이상 특정 인물을 닮은 초상이 아니다. 커다란 두 눈은 먼 곳을 응시하여 초월적인 인상을 준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초상은 높이가 2.6미터에 달하는 실로 큰 두상이지만 이 또한 거대한 좌상의 일부이니 실제의 황제 상은 거의 12미터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황제 상은 인간의 상이기보다 숭배의 상이 된 것이다. 로마사에서는 1-2세기를 황금시대라 하고, 정치적인 쇠퇴가 이어진 3-4세기를 녹슨 철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한때는 47년 동안 25명의 황제가 바뀌고, 그 중 1명만이 차기 침대에서 죽었다고 하니, 죽고 죽이는 무력에 의한 황제 찬탈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사회와 인간의 삶은 합리적인 상식으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으니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지도자와 신비종교를 요구하는 것이다.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기에 발달하였던 그리스 회화의 원작은 거의 소실된 데반해, 로마에서 수용한 모습은 남아 있는 예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기원후 79년 화산 폭발로 도시 대부분이 화산재로 뒤덮였던 폼페이는 당시 건축과 회화의 생생한 현장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다양하고 풍부한 폼페이의 회화양식은 4단계로 설명할 수 있.  

     

    제 1 양식

     

     우선 <살루스트의 집> 그림부터 보자. 아마 독자들은 그림이 어디 있는지 찾게 될 것이다. 돌을 쌓은 듯한 벽이 바로 그림이다. 그림이 벗겨진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벽돌이나 콘크리트 벽을 쌓은 후 회벽을 칠하여서 마치 대리석 벽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실내장식의 벽화이다. 아랫단과 윗단 사이는 석고를 도톰히 하여 더 튀어나와 보이게 하는 스투코 방식도 그림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마치 속임을 당한 듯 실망스럽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지금의 우리도 사용하고 있다. 베니어판에 얇은 원목이나 원목 무늬의 비닐을 붙이는 것과 같은 수법이 그것이다. '석재양식'이라고 부르는 이런 그림은 헬레니즘 시대부터 지중해 전역에 사용되었던 방식으로 폼페이의 제1양식은 이 석재양식의 이탈리아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제 2 양식

     

     기원전 1세기 초에서 말 사이에 유행하였던 제2양식은 한층 더 발달된 눈속임의 효과를 보여 준다. 그 초기 형태는 로마의 팔라티네 언덕에서 발굴된 일명 <그리핀의 집> 벽화에서 볼 수 있다. 마치 다양한 색의 돌을 맞추어 벽면 무늬를 만들고 그 양쪽에 산호무늬 대리석을 붙인 것 같지 않은가? 바닥에서 발코니와 기둥, 그리고 천장 가까이의 석가래까지 건축적 요서들을 모두 프레스코화법으로 그려 벽면이 입체감 있게 느껴지게 된다. 제1양식과는 달리 제2양식에서는 스투코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회화의 원근법을 사용해서 깊이감과 양감을 나타내고 있다.

     

     제2양식의 가장 발달된 모습은 나풀리 근처 보스코레알레 지역의 한 별장, 침실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작은 침실이지만 마치 창밖으로 정원과 이웃집들이 보이는 열린 공간으로 느껴진다. 기둥과 감실 등으로 건축적인 틀을 설정하고 그 안의 면적을 마치 창문 너머의 광경이 보이는 것처럼 효과를 내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서양에서의 그림의 역할을 예고하고 있다. 즉 그림의 가장 큰 목적은 실제 사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사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영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19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 3 양식

     

     이렇게 실내를 꾸미는 벽화는 장식적인 기능에 걸맞는 양식을 만들어가게 된다. 폼페이에 있는 일명 <베티의 집>벽화를 보면 기둥 사이에 펼쳐진 창너머의 그림이라는 요소를 이어받고 있지만 기둥이 너무 가늘어서 실제 건물같이 느껴지지 않으며 기둥 사이의 그림도 창밖의 풍경이기보다는 그림이 걸려있는 듯한 구성이다. 

     

     폼페이의 일명 <M. 루크레티우스 프론토의 집> 벽화 부분들에 선명한 붉은색이나 까만 바탕에 잔무늬의 장식을 두르고 그 가운데 그리스 신화 이야기 그림을 걸어놓은 듯한 장식벽화가 집 안 전체에 그려져 있다고 상상해보라. 로마 귀족들의 화려한 삶과 이 많은 벽화의 수요에 동분서주했을 화가들의 삶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제 4 양식

     제4양식은 1,2,3양식과 같이 그렇게 분명히 구분하기가 좀 곤란 하다. 2,3양식이 절충되고, 이와는 매우 다른 장식적인 양식들이 함께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천장과 벽을 이어가며 만드는 기하학적인 연결은 마치 '벽지 패턴'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외에도 로마벽화에서는 환영 기능을 하면서도 그리스 방식과는 다른 회화방식도 형성되었다. 그림이 신비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폼페이의 <신비의 집>벽화에서는 한 방의 네 벽면에 거의 등신대의 인물들이 마치 연극과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비너스에게 구애하는 마르스>와 같은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은 근경, 중경, 원경으로 공간감 있게 구성되어 있는 데 반해 <신비의 집> 인물들은 평면적인 배경에 거의 근경의 인물로 그려져 있다. 아마도 이야기 서술을 강조하는 로마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인물 중에 실레누스형의 남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바커스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짐작되지만 분명하지는 않으며 특정한 의식을 행하는 장면인 듯하다. 

     

     환영 기법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지만 로마에서는 이를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부인인 리비아의 별장 지하에는 정원만을 그린 벽화가 그려졌다. 정원의 담장이나 환영적인 방법은 앞서 살핀 제2양식과 연관지을 수 있으나 건축적 기능의 기둥은 모퉁이에도 그려지지 않았다. 미풍에 흩날리는 나무들은 향기마저 느낄 수 있을 듯 감미롭다. 아마도 여름철을 위한 시원한 지하 식당인 듯한데, 이곳에 앉아 있으면 지하이면서도 사방이 정원으로 둘러싸여서 시야가 탁 트인 듯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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