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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 서유럽 미술의 형성_1카테고리 없음 2023. 7. 17. 15:47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전달하기 어려운 시기가 바로 중세 초기의 유럽 미술이 아닌가 싶다.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 사람들의 눈에 확 띄는 작품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작품들은 대부분 미사도구나 성경책의 삽화들이기 때문에 크기도 매우 작으며, 특정한 문화의 성격이 형성된 시대가 아니어서 독자적인 특성을 부각시키기도 어려운 시대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특성이다. 게르만족이 유럽 전역에 분포되어 정착하면서 국가를 형성하고 라틴족의 발달된 문화와 기독교를 수용하는 시기이니만큼 이 세 가지 문화가 혼재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미술이 어떤 면에선 미흡하지만 만약 이 시기가 없었다면 이후의 서양미술은 현재의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다른 모슴이었을 것이다. 게르만민족이 유럽 전역으로 이동하면서 그 중 앵글로색슨족은 현재의 영국에, 프랑크족은 프랑스에, 게르만족은 독일에, 고트족은 이탈리아에 정착하였다. 프랑크족은 강력한 왕조를 형성하여 카롤링거 왕조라 불렀으며, 샤를마뉴 전성기엔 전 유럽이 그의 휘하에 있었다. 초기의 양글로색슨 미술과 카롤링거 왕조의 미술, 그리고 독일 영역에서 발달한 오토 왕조의 미술을 간단히 살펴보자.
앵글로색슨의 래드월드 왕의 무덤은 일종의 수장으로 배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은 이곳의 미술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다. 왕의 의관 중의 일부라고 짐작되는 버클이나 나무상자의 경첩 문양은 언뜻 보면 뒤엉켜 있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질서 있는 매듭무늬가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작은 기물이지만 여기에 새겨진 기이한 동물과 좌우 대칭적인 배치들은 이 민족의 초기 미술 형성에 대한 궁금증이 일게 한다.
이러한 문양은 필사본에서도 사용되어서 <더로우 서적>의 한 페이지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물문양이 끊없이 이어져 환상적인 시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정밀한 문양과는 달리 같은 책에 그려진 복음사가 마태의 묘사는 마치 팔이 없는 종이인형 같다. 아마 환상적인 문양이 발달하는 시대에 상대적으로 인물묘사는 실제감을 갖지 못하는 듯싶다.
현재의 독일 서북쪽 아헨을 수도로 하고 있던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는 80년 12월 25일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왕관을 받았다. 이는 전 유럽의 지도자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샤를마뉴 개인의 욕망의 소산일 수 있지만, 북유럽 지배자가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매우 시사적인 사건이다. 샤를마뉴는 또한 고대문화를 적극 받아들임으로써 당시까지만 해도 야만족 취급을 받던 북방의 문화를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자제들을 가르치고, 공식서류는 라틴어로 작성하게 하였다.
샤를마뉴가 고대미술을 수용하기 전과 후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실로 큰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군도히노 복음서에 그려진 <네 복음사가에서 둘러싸인 그리스도>를 보면 필선이 매우 거칠고, 예수의 어깨나 무릎에서 보듯이 비례나 묘사력이 매우 조야하다. 이에 비해서 고대미술을 수용한 800년경에 제작된 아다 복음서의 인물묘사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세련되었다. 이전의 조야함이 사라져 선명하고 다양한 색채와 능숙한 필체가 구사된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러나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건물의 원근감을 위해 중앙을 파서 들여보내기도 하고, 양감의 묘사를 위해 옷주름을 묘사했지만 오히려 평면적으로 보인다. 들고 있는 책도 뒤가 더 넒어서 원근법에 방해가 된다. 또한 옷주름도 그들이 모델로 하였을 고대회화의 방법과 비교해보면 윤곽선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에 양감의 효과가 덜 하다. 그러나 우리가 미술사에서 범하지 말아야 할 태도는 무엇과 비교해서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에서는 고대문화를 적극 받아들임으로써 문화발전에 큰 힘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보겠지만 이들의 특징은 다이내미즘에 있다.
복음사가를 그린 또 다른 두 복음서 삽화는 매우 대조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코로네이션 복음서의 마태는 복음서를 쓰는 데 열중하고 있다. 마태의 얼굴은 마치 로마의 검투사 같은 느낌의 건장한 얼굴이며 몸에 두른 흰 토가는 양감 있게 처리되었다. 반면에 에보 복음서의 마가가 입은 토가는 바람에 흩날리는 듯 다이내믹한 필체로 묘사되었다. 앞의 예는 그들이 수용한 고대 방식에 충실한 그림이라면 뒤의 예는 거칠지만 에너지가 더 넘치는, 원래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방식인 듯하다. 비록 회화로서의 완결미는 없지만 활달한 묘사력과 설명력을 갖춘, 고대회화와 중세회화의 장점을 적절히 구사한 카롤링거 왕조 미술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삽화이다. 고대문화를 받아들여 프랑크족의 조야함을 극복하고 학문과 예술을 발달시킨 이 시대 미술을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라 일컫는다. 그러나 물론 15-16세기 르네상스와는 많이 다르다. 카롤링거 왕조의 문예발달은 사회 전반의 부흥이기보다 궁정과 상류층에 제한된 엘리트 문화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필사본의 삽화는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를 그림으로 설명한다. 아담과 이브의 창조, 사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경고, 그리고 세 번째 칸엔 선악과를 따먹고 수치심을 느끼는 아담과 이브, 마지막 칸엔 낙원 추방에 이어지는 여자의 출산과 육아, 남자의 노동이라는 죄과가 그려진다. 화면을 칸으로 나누고 시간의 연속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한 방법은 현대의 만화 수법이다. 여기서는 장면과 장면 사이를 나무로 구획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남녀를 구분하기 어렵고, 사과를 따서 아담에게 주는 장면에선 한 장면에 이브가 두 번 묘사되기도 한다.